lacri [2] · MS 2002 · 쪽지

2012-04-10 14: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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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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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는 아침 6시면 출근하기 위해 집에서 나옵니다. 다시 집에 들어오면 8시입니다. 직장이 집과 수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총선이나 대선처럼 공휴일이 아닌 선거일에는 투표를 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가장 최근의 투표는 저녁 7시 57분에 간신히 마쳤습니다. 퇴근길에 버스를 타고 투표소까지 가면 8시를 넘어갈 것이기 때문에, 택시를 잡아 타고 갔습니다. 그날 병상에 누워있던 집사람은 옆 동네 친구가 투표소까지 차로 태워가고 다시 집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강남에 살다 보면, 이기거나 질 게 뻔해 보이는 투표에도, 다른 지역에 비해 높은 투표율이 나오거나, 당선자가 낙선자를 엄청난 득표율 차이로 K.O. 시켜버리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낙선한 후보가 '조금만 더 밀어 붙이면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애초에 갖지 못하도록, 아예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강남구의 1인당 '구민소득'은 이제 거의 10만불에 육박합니다. 10만불을 버는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투표를 합니다. 아니, 이런 식으로 투표를 하니 10만불을 벌게 된다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몇 년 간을 20대 사장으로 살았습니다. 20대와는 관심사가 다르고, 4,50대와는 나이가 다르니, 여기에 끼이지도 못하고, 저기에 끼이지도 못하며 겉도는 관찰자의 인생이었습니다.

제 주변 20대가 모두 평범한 20대는 아니고, 제 주변 4,50대가 모두 평범한 4,50대는 아니겠지만, 제가 본 20대들은 겁먹고 주눅들어 있었습니다. 10대 때는 명문대에 가지 못할까 겁먹은 채 공부만 했고, 지금은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하지 못할까 겁먹은 채 고시 준비를 하거나 스펙을 쌓습니다. 4,50대가 짜놓은, 20대에게 너무 불리한 프레임에 맞추어 경쟁하고 시달리고 있는데, 애초에 경쟁률이 너무 높아 성공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보통은 실패하니 잔뜩 주눅들어 있고 겁먹어 있습니다. 당장 등록금 대출을 갚고 결혼 비용을 모으는 게 급하다 보니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정치에 참여하는 20대도 기성세대의 마리오네트로 전락한 것 같습니다.

지금의 40대는 그들이 젊었을 때, 누구의 거수기 역할도 하지 않고, 그들의 젊음으로 민주주의라는 그들만의 이니셔티브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대를 관통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50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를 일으킨 건국 세대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지금의 20대에게 있어서 세대를 관통하는 중심 가치는 무엇이며, 무엇에 공감합니까?

저는 우리나라를 진정한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는 것이 지금 20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처럼 계속 내달려서 타국민들이 부러워하는 성공 신화를 쌓아나가는 것이 답일 수도 있고, 복지를 확대해서 빈곤층을 없애는 것이 답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성장이나 분배의 일차원적인 척도를 넘어서, 후진국의 인권이나 전지구적인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는 식으로 의식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 답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제 생각과는 전혀 달라도 상관 없으니 20대들이 본인의 생각을 갖고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토론하고 본인의 신념에 따라 투표하기를 원합니다.

20대는 부양가족이 없습니다. 마누라나 남편, 자식이 없는 20대만이 탐할 수 있는 순수한 가치와 거대담론이 있습니다. 그런 가치를 되돌아 보고 내세울 수 있는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며, 그런 발걸음이 쌓여서 선진국을 만듭니다. 우리 현대사를 되돌아 보면, 누가 대한민국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까? 항상 젊은이들이었습니다. 6,70년대에 주말도 없이 밤낮으로 공장에서 일한 것도 젊은이였고, 8,90년대에 헌법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싸운 것도 젊은이였습니다. 20대가 정치에 관심을 보이는 나라는 정의와 자유, 민주주의를 주제로 싸웁니다. 20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 재개발 재건축이나 가지고 나라가 싸우고 있게 됩니다.


20대 자신을 챙기는 것도 20대의 역할입니다. 그렇게 먹고 살기 힘들다던 30년 전에는 어떻게 다들 빚 갚고, 취업하고, 결혼해서 애 둘셋 낳고 살았습니까? 지금 20대는 어렸을 때 곤충채집도 못하고, 동네 축구도 못하고, 초등학생 때부터 조기교육에 시달리며, 잘 먹고 잘 살자고 공부만 했는데, 왜 이렇게 힘든 삶을 삽니까? 30년 전에도 공무원 시험 합격하기가 이렇게 어렵고, 초등학교 교사 되기가 이렇게 어려웠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는 항상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공무원, 초등학교 교사가 이미 된 사람들이 밥그릇을 쥐고 놓지 않기 때문에 20대가 비집고 틀어갈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정년 단축을 안 해서 20대를 안 뽑습니까? 5,60대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은 당선되고, 20대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공무원 정년은 그들이 정합니다. 기성세대들은 항상 갓 사회에 진입한 20대들과 아직 투표권이 없는 더 어린 세대가 가져야 할 미래의 부를 당겨쓸 궁리만 합니다.

권력을 이미 가진 사람들, 그리고 부를 쥐고 있는 세대들은 차지하고 있는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20대를 협박하고, 기죽입니다. 20대들이 가진 게 없어서,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 가겠다고 협박할 수가 없으니, 이제는 있지도 않은 미래의 부를 빼앗겠다며 겁을 줍니다. 간신히 벌어먹고 살지만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 위해 말대꾸하지 말고 고시 준비나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한 50대가 2,30대에게 불리한 룰을 만들어 놓고, 지배하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 구조를 없애지 못하면, 30년 후에는 50대가 되어 80대에게 계속 지배를 받고 있을 것입니다. 아, 이미 그러고 있는 나라가 있는데, 젊은이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고, 80대 이상이 부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일본입니다. 


막상 선진국 중에도 국민이 최고권력자를 직접 선출하는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최고권력자를 직접 뽑을 수 있는 권리는 하늘에서 떨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오랫동안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스스로 괴물이 되어 더 강하고 더 오래 지속되는 권력을 탐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투표권은 할아버지 세대들이 50년 전에, 그리고 아버지 세대들이 30년 전에 길바닥에 피 쏟고 밀실에서 전기고문 당하며 빼앗아 온 것입니다. 그들이 흘린 피를 한데 모으면 한강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입시에서 1점 깎이는 게 무서워서 고등학생들은 99% 출석을 합니다. 그런데 20대는 투표소에 몇 % 출석합니까?

국민이 정치를 혐오하면, 정치도 국민을 혐오합니다. '투표 전 날이나 우리에게 굽신거리지, 며칠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굴껄'이라며 정치인을 혐오하지만, 유권자도 투표 전 날이나 지역구 의원이 뭐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잘못한 정치인을 지지 정당이라 해서 맹목적으로 표를 몰아주면, 정치인도 맹목적으로 계속 잘못을 할 것입니다. 

왜 우리는 영국이나 미국처럼 당파를 떠나 모든 국민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이 없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런데 그런 정치인이 우리에게는 없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표를 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정치인의 수준은 그를 뽑아놓은 국민의 수준을 대변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당이 옳고 그른지를 떠나, 병들지 않은 건강한 후보에게 투표를 해서, 모든 국민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이 한국에도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정치인은 길들여지지 않고 겁먹지 않는, 자유의지를 가진 젊은이를 두려워합니다. 때로는 물리적인 폭력까지 행사했을 정도로 말입니다. 가진 게 없어서 잃을 것도 없는 20대가 무엇이 두렵습니까. 모두 투표소에 나가, 20대의 이익을 위해 투표하십시오. 혹시라도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세대의 이익을 넘어서, 진정 옳은 가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진정한 선진국으로 밀어 올릴 수 있는 후보에게 투표해 주십시오. 20대도 정치를 주도하는 세대가 되어, 나중에 50대가 되면, 그때의 20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성숙하고 자랑스러운 세대가 되어 주십시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저도 한 표 던지겠습니다. 모두 내일 투표소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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