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엽 국어] 객관적 상관물(16)
영웅은 죽음에 다다른 고난을 극복한 자이다.
시는 서정 갈래로, 시인은 자신의 관점으로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반응하면서 정서를 표현한다. 즉,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은 시인이 인식하기 전까지는 화자와 정서적으로 관련이 없는 존재들이나 시인이 인식하는 순간 시적 화자의 정서와 상관성을 맺게 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바로 이러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시적 대상에는 사물(자연물, 인공물), 사건, 현상(자연 현상, 사회 현상)이 모두 포함된다. 우선 대표적으로 시적 화자가 자신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환기하는 객관적 상관물을 알아보도록 하자.
1. 객관적 상관물
객관적인 사물이 어떤 식으로든지 시적 화자와 관련을 맺어 시적 화자의 정서나 상황을 드러내는데 기여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객관적인 사물이 어느 특정한 순간 시적 화자와 관련성을 가진 사물이 되었다는 말이다.
객관적 상관물이 제시되는 방법은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① 화자가 처한 상황이나 작품의 분위기를 부각할 수 있는 사물을 제시하는 방식
하이얀 모색(暮色)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단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을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힌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김광균,
위 시에서 ‘파란 역등을 단 한 대의 마차’, ‘산마루 길 위의 전신주’, ‘지나가는 구름 하나’ 등의 사물은 쓸쓸하고 고독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시어들은 작품 내에서 공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동시에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화자가 우수 어린 시선으로 풍경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② 감정이입을 통한 방식
감정이입이란 원래 연극에서 관객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에게 빠져 특정 인물이 체험하며 느끼는 감정을 자신 역시 똑같이 느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보통 시에서는 화자의 감정을 특정 사물에 투영하고 자신과 동일시하여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넘어가려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은
칠팔십 리
돌아서서 육십 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 년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삼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김소월,
위 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시적 화자의 외로움과 비애를 산새에 감정이입하여 표현하고 있다. 특히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깊은 산에 돌아가고자 하지만 높은 고개에 가로막혀 울고 있는 산새의 모습에 삼수갑산에 돌아가지 못하고 울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③ 대조를 통한 제시 방식
시적 화자의 처지나 상황과 대조되는 대상을 제시하여 화자의 감정을 촉발시키거나 고조시켜 정서를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
저 청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저 눈부신 산맥
왜 날 울리나
날으는 새여
묶인 이 가슴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여
피만이 흐르네 / 더운 여름날의 썩은 피
땅을 기는 육신이 너를 우러러
낮이면 낮 그여 한번은
울 줄 아는 이 서러운 눈도 아예
시뻘건 몸뚱어리 몸부림 함께
함께 *답새라
아 끝없이 새하얀 사슬 소리여 새여
죽어 너 되는 날의 길고 아득함이여
낮이 밝을수록 침침해 가는
넋 속의 저 짧은
여위어 가는 저 짧은 볕발을 스쳐 떠나가는 새
청청한 하늘 끝 / 푸르른 저 산맥 너머 떠나가는 새
왜 날 울리나 / 덧없는 가없는 저 눈부신 구름
아아 묶인 이 가슴
-김지하,
* 답새라: ‘치워 버려라’, ‘없애 버려라’의 뜻
위 시는 억압 상황에 놓인 화자가 감방 창살 밖에 펼쳐진 푸른 하늘의 흰 구름 사이로 날아가는 새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육체적 괴로움과 절망적 심정 그리고 자유에 대한 갈망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새’는 화자의 처지와 대조되는 자유로운 이미지를 가진 대상으로 화자의 갇혀 있는 처지와 상황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2. 구체적 형상화
구체적 형상화란 형체를 갖고 있지 않은 대상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내어 실감
나게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독자에게 선명하고 사실감 있는 이미지를 제공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주로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구현된다.
겨울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김남조,
⇢무형(無形)의 대상인 ‘바람’을 ‘머리채 긴’, ‘투명한 빨래’라는 표현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은총’, ‘섭리’와 같이 우리의 감각으로 파악이 안 되는 추상적인 개념을 ‘돌층계’, ‘자갈밭’ 같이 감각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대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위 시의 화자는 겨울 어느 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면서 ‘나무’와 ‘바람’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긴밀한 관계임을 문득 깨닫는다. 바람이 불어야 나무는 흔들리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바람 역시 나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절대 홀로일 수 없는 존재이며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으로 시상이 확장된다.
cf) 구체적 형상화 ≒ 관념의 구체화
우리는 앞서 ‘구체적 형상화’에 대해 알아보았다. 반복해 말한다면 ‘구체적 형상화’란 구체적이지 않은 대상이나 관념을 감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마치 눈에 보이듯 생생하고 선명하게 그려내는 것을 말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용되는 용어로 ‘관념의 구체화’가 있다. 관념이란 사람의 머릿 속에 나타나는 추상적인 생각을 말한다. 따라서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이다. 이것을 구체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체적 형상화’와 마찬가지로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대상을 이용해서 그것에 빗대어 표현할 수도 있다. 즉 비유나 상징의 방법을 사용하여 나타낼 수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저어 오오.
-김동명,
위 시에서 보듯 ‘마음’과 같은 추상적 대상을 ‘호수’라는 눈에 보이는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 ‘관념의 구체화’이다. 좀 더 추가해 본다면
*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 선지의 속살
시적 화자와 시적 대상의 관계를 묻는 문제는 빈번하게 출제되는 유형이다.
➊ 자연물을 통해 정서를 환기한다. (2008년도 9월 평가원)
➋ 시적 상황에 대한 화자의 인식을 자연물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2010년도 9월 평가원)
➌ ㉤은 ‘슬픈 역사’라는 추상적 관념을 ‘돋혀 있는 비늘’로 표현하여 시각적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2010년도 10월 서울교육청)
‘자연물을 통해 정서를 환기한다.’는 말은 자연물을 통해 특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시의 특정 시어들은 추상적인 정서를 구체화 / 형상화 / 환기 /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따라서 ‘~을 통해 정서를 암시한다.’, ‘~을 통해 정서를 구체화한다.’, ‘~구체적 형상화를 통해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등의 답선지의 표현은 외부 세계를 시인이 주관적으로 수용하여 구체화한 것으로 시의 본질적인 성격상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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