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379481] · MS 2011 · 쪽지

2011-12-27 12:14:59
조회수 637

LATE STYLE

게시글 주소: https://rocket.orbi.kr/0002470172




이른바 “老年 예술”(old-age art)의 문제는 신비하고 영원히 흥미롭다. 삶의 끄트머리까지도 줄기차게 일하는 창작 예술가들은 지각변동이라 할 만한 변화를 겪는 듯싶다. 精製와 새롭게 용솟음치는 치열함, 그리고 군더더기와 장식들을 죄다 쳐내고서 깊숙이 들어있는 알짬만을 드러내는 것 등등. 이러한 현상의 한 예이기도 한 예이츠는 이런 식으로 그 현상을 형상화했다.

잎새는 많으나 뿌리는 하나
내 청춘의 드러누운 나날들 내내
난 햇볕에 내 잎새와 꽃잎을 털었네
나 이제 진실 속으로 시들어 가려나.

1966년에 첫 작품을 낸 니콜라스 델뱅코는 이러한 ‘노화과정’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인정한다. 이번에 그가 새로 낸 책 “지속이라는 것─노년의 예술”(Lastingness: The Art of Old Age)에서 그는 마티스나 모네, 소포클레스, 시벨리우스, 피카소, 토마스 하디, 그리고 본 윌리엄스 등의 위대한 長老들이 삶의 황혼기에 내놓은 작품들을 톺고 있다. 어째서 어떤 예술가들 (델뱅코는 소울 벨로우와 제임스 볼드윈 및 노만 메일러를 예로 들고 있다.)은 어린 나이에 늙어서 모든 창작 에너지가 말라버리고 인생 후반기에는 이류 작품들만 생산해 내는지, 그 반면 어째서 어떤 예술가들은 나이가 들면서 가속을 받아 외려 노년에 정점에 이르는지, 그리고 이처럼 위대한 ‘노년예술가’들 사이에 공통점이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저자는 하고 있다.

[…]

젊을 때는 “자신이 탈고한 작품을 세상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신경을 쓰지 탈고까지의 과정에는 신경을 쓰지 못한다.”고 델뱅코는 말한다. 나이가 들면서 작가는 결과보다 과정에 더욱 관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팔리는가에 신경을 덜 쓰게 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남한테 보여주는 것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작품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이 차츰 줏대가 되며 만족감의 원천은 밖이 아니라 안이 되어 간다. 그러나 이것은 노년에 만들어지는 걸작들의 스타일이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초점이 잡혀있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부족하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식의 전면에 부상한 것 또한 큰 몫을 하고 있지 싶다. 새뮤얼 존슨이 말하듯, “스무 날 후에 자신이 처형될 것을 아는 사람의 마음은 놀랍도록 선명하게 초점이 잡힌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관점과 가치관이 확 뒤바뀐다. 델뱅코는 카를 융의 말을 인용한다.

“인생의 낮과 밤을 인생의 아침에 짜여진 프로그램에 맞추어서 살 수는 없다. 아침에 대수로웠던 것이 저녁이 되면 사소하게 되고 아침에 참이었던 것이 저녁에는 거짓이 되는 까닭이다.”

[…]

COMMENT

요새 잘난 인간들이 한국 교육에 대해서 문제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들의 표본은 기실 나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시험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가 書鬼라 할 만한 사람이었던 덕에 이것저것 독서를 할 기회는 있었으되 문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무협지 읽은 게 다였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한국 문학이라고 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것 빼고는 읽은 게 거의 없다. 내가 블로깅을 시작한 삼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우리말 공부를 위해서 블로깅을 시작한 후 동네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한국 서적 가운데 문학상 수상집들을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이상문학상의 경우는 몇 해 빼고는 다 읽었지 싶다. 동인 문학상, 현대 문학상 수상집은 몇 권 없었지만 그래도 비치되어 있는 것은 죄다 읽었다.

대개의 작품의 경우 읽는 것은 고역이었다. 어찌 그리도 사춘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온갖 개폼을 잡고 갖가지 멋은 다 부리는 듯 느껴지는데도 저는 담백하다고 외쳐대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기실 이 ‘외쳐대다’라는 동사는 우리나라 문학 작품을 통틀어서 일반화할 때 가장 적합하지 않나 싶다. 눈으로 읽는데 귀가 따갑다. 그래서 수험공부 하는 셈 치고 외울 만한 낱말을 찾아내는 데에 중점을 두고 읽었다.

두 작가만은 예외였다. 김훈과 박완서였다.

박완서의 글은 멋을 부리지 않는다. 질박하다. 이는 그가 낱말을 고르고 문장을 짜는 데에서도 드러나지만 그가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 철저하게 배어있다. 다른 작가들처럼 세뇌되어 굳어진 틀이나 사춘기 때 (대개는 아무리 나이 먹어도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지만) 선배, 책 따위한테서 주입받은 이론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 풍화되고 썩어서 지적 허영으로만 남는)에 얽매이지 않고 맑은 눈으로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게 글의 구구절절 느껴진다. 그래서 그의 글은 따뜻하다. 삶과 세상은 분명 따뜻하지 않을진대(특히 그가 걸은 삶의 역정과 겪은 세상은 더더욱), 차가움도, 아픔도, 슬픔도 그의 글에 걸러지면 따뜻해지고 정화되어 말개진다. 된 것도 묽어진다.

박완서가 나이 마흔에 등단한 것은 유명한 얘기지만 아마 이런 작가가 또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하면 그럴 공산은 크지 않을 듯싶다. 특히 겉멋만 잔뜩 든 사람들이 한국 문단을 지배하고 있는 한.

박완서 선생님. 저승에서의 복을 두 손 모아 빕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글에서만은 나잇값을 떳떳이 하고 싶다.” -박완서-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첫번째 댓글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